성소자 게시판

덜어내기

작성자
남궁 영미
작성일
2021-02-01 14:14
조회
130







저는 11개월의 타지 생활을 마치고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들께 편지를 보내고 전화를 하는 등 훈훈한 마무리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무리 중 하나인 짐과의 전쟁도 빠질 수 없죠.
‘짐을 정리하고 버릴 것을 다 버렸으니 이제 가방에 넣기만 하면 되는구나!’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가방 싸기는 며칠째 진행 중입니다.

가방에 꾸역꾸역 짐을 넣고 무게를 재고 다시 열어서 가방끼리 물건을 바꿔 담아 다시 무게를 재고.
마치 퍼즐 맞추듯 이 가방에서 저 가방으로 물건을 옮겨 가며 싸던 저는 다시 한번 덜어 내는 결단을 하지 않으면 이 과정을 끝낼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괜한 욕심에, 나중에 필요할 것 같아서, 언젠가 볼 것 같아 챙겼던 물건들이 가방 옆에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쓰레기통에 나눠 담으며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제가 짐과 씨름하는 동안, 아침부터 뒷마당은 장비 소리로 가득합니다.
예전부터 있었다는 대나무들이 위로 끝없이 자란 탓에, 3층에 있는 제 방에서도 올려다봐야 할 정도고 덕분에 그늘이 생기는 자리가 늘어났습니다.
옆으로도 엄청나게 번식하여 담장을 쓰러뜨릴 지경인데다, 옆집 마당까지 대나무가 늘어났으니 더 이상의 민폐가 없네요.
상의 끝에 대나무를 모두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전기톱 소리와 함께 넘어가는 대나무들을 보고 있자니, 저렇게 많았나 싶습니다.
11개월 전, 제가 처음 여기에 도착했을 땐, 분명 다른 나무와 대나무를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방금 넘어간 대나무도 원래 있던 과일나무의 가지인 줄 알았으니 그사이 무감해졌었나 봅니다.
좀 더 신경을 써서 대나무와 과일나무를 구별하지 않은 탓도 있겠으나, ‘뭐 별일 있겠어? 다 그런 것이지’ 하는 귀찮은 마음도 함께였던 것 같습니다.
덜어 내기 귀찮아서, 힘들어서, 어떤 이유에서든 존중한다는 이름으로, 뭔가 있을 것 같아서, 싸우기 싫어서,
나랑 상관없는 일이어서 내버려 두었던 일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얼마나 무섭게 변하고 번식하는지 다들 경험해 보셨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들까지 덮어 버려 모두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우리 삶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들에 대해 결단을 내리고 덜어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일상적이라 작게 느껴지는 일이던, 신념의 문제라 철학적 접근이나 정확한 정보의 확인이 필요한 일이든 상관없이
모든 것은 ‘덜어냄’이라는 주제 앞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덜어냄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덜어 내기 위한 정확한 이유입니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최소 나 자신이 동의가 되는, 어떤 사안에서는 공공의 선을 위한 이유가 되겠지요.

다음은 덜어냄의 판단 기준을 세울 때 솔직하게 나와 직면하는 일입니다.
‘누구와 연결되어 있어서, 명분상, 내가 그렇다고 믿어 왔던 것이어서, 싸우기 싫어서’가 판단의 기준이 되면 안 됩니다.
정말 필요한 것인가, 왜인가에 대한 솔직한 생각 그리고 다양한 시각의 사람들과 의견 나눔을 통해 되도록 객관적 판단 기준을 세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마지막은 용기입니다.
떠날 수 있는 용기, 버릴 수 있는 용기, 평소에 하지 않은 일을 하는 데 생각보다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더 생각해야 하고 더 움직여야 합니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용기를 내어 쓰지 않던 근육을 사용해야 하고 어색하지만 다른 쪽의 의견을 듣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에는 우리 자신의 용기가 원동력으로 필요합니다.





가방 두 개 싸는 데 일주일이나 걸리는 제가 말씀드리기 좀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어서 제안해 봅니다.
덜어내기에 동참하시겠습니까?
내 주변에 널려 있는 짐들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걱정거리,
그리고 우리를 점점 더 갈라 놓고 서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혼재된 여러 신념까지 말입니다.
우리 삶 안에 중요한 것은 정해져 있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단지, 덜어내기에 소홀한 시간의 틈을 타고 여러 다른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완고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시간이 좀 오래 걸릴지도, 복잡하고 힘들어서 조금 후회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의미 있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덜어내기에 동참하시겠습니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루카 10,41-42)



이지현, 성심수녀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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