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자 게시판

내 안의 밀알 하나

작성자
남궁 영미
작성일
2021-03-23 16:53
조회
94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예쁘게 인사하는 어린이군요?”

우연히 들른 공원에서 처음 보는 어린이의 밝은 인사에 언제부터인가 딱딱해져 버린 저의 마음을 의식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어색함도 잠시, 무표정이었을 제 모습에도 밝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네준 어린이 덕에 비로소 서로 웃으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마스크를 필수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을까?
아니 그 훨씬 전부터였을까?
이유도 시기도 기억나지 않지만, 저에게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색한 일입니다.
아마 새로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쓰일 에너지가 제 안의 평화를 뒤흔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냥 모험하고 싶지 않은 가만히 있고 싶은 마음이라고 표현해야 정확한 것일까요?

그 어느 때보다 나의 모든 생활 반경 안에서 ‘안전’의 필요성을 의식하며 사는 시대입니다.
안전한 공간, 안전한 사람, 안전한 만남과 이별을 포함하는 안전한 관계.

산재한 위험에 대한 정확한 매뉴얼이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에 우리는 각자의 방법으로 안전함을 찾고 있습니다.
나의 생존을 위한 안전함을 위해 겹겹이 둘러친 울타리들이 나만의 안정적인 자리를 만들고 다른 사람들이 들여다볼 틈 없는 견고한 공간을 만듭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것의 편안함에 익숙해져 갑니다.
우리는 이것을 ‘안정감’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가끔은 젊은 시절 꿈꿨던 치기 어린 이상향들이 불쑥 올라와 나를 둘러싼 편안함을 불편하게 느끼게도 합니다.
그러나 마성의 안정감은 지친 저를 다독이며 ‘그래도 괜찮다’며 불편함에 눈감게 합니다.

안정감의 달콤함에 휘둘려 나만의 성에서 문을 꼭꼭 잠그고 있는 저의 이야기입니다.
조금의 균열에도 안전하지 않다고 외치는 저는, 사실 안정감이 깨지는 것이 두려워 방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 안에 밀알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그저 소중하게만 간직한다면 깨끗한 상자 안에 잘 보관된 씨앗 하나로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땅속 어둠의 오랜 시간을 견디고, 씨앗을 깨고 나오는 아픔을 지나고 나면 더욱 풍성한 잎과 열매들이 가득한 확장된 나를 만날 수 있게 되겠지요.

안전함과 안정감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우리를 끌어내려 주저앉히는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젊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지금보다 잃을 것이 없었던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그때 무엇을 꿈꾸고 이야기했었던지 기억하십니까?

내 마음 안의 밀알 하나에 생기는 균열에 동요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안전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더 넓고 깊은 하느님의 나라를 향한 초대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뛰게 했던 그 꿈들을 다시 기억하고 지금의 자리, 안정적인 나만의 성에서 조금씩 나와 본다면, 안전이 필요한 시대,
안정감을 그리워하는 이 시대에 서로에게 그런 공간과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이지현, 성심수녀회 수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전체 0